21대 국회의 마지막 예산안을 심사하는 여야가 내년 총선을 의식한 ‘선심성 퍼주기’ 정책에 골몰하고 있다. 야당은 전면적인 증액 요구에 나서면서도 정부 예산안은 무더기 칼질에 나섰다. 여당 역시 ‘선거용 돈 풀기’ 사업을 줄줄이 예고하면서 포퓰리즘 정책 경쟁에 돌입한 모양새다.
20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예산심사에서 여야 간 ‘묻지마식 예산 증액’으로 재정 건전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이날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단독 의결된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5조3979억 원)과 문화체육관광위원회(5021억 원)을 비롯해 보건복지위원회(3조 7431억 원)·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2조 3047억 원)·국토교통위원회(1조 1800억 원) 등 12개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증액 의결한 예산 규모만 약 14조 8673억 원에 이른다.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에도 예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다.
과반 의석을 앞세운 더불어민주당은 상임위원회별 예산 심사 과정에서 각종 예산을 단독 의결하면서 ‘예산 증액’을 주도하고 있다. 민주당은 정부가 삭감한 연구개발(R&D) 예산을 8000억 원 가량 늘린 데 이어 ‘이재명표 정책’이라 할 수 있는 주요 사업에서 예산을 연이어 늘리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이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야당 위원들을 중심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경기지사 시절 브랜드인 지역사랑상품권 예산을 7053억 원 증액했다. 정부와 여당은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소상공인 보호와 소비 촉진을 위해 재정을 투입해 추진한 정책이기 때문에 유행이 종식된 상황에서는 반영이 필요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올해에 이어 내년도에도 해당 사업 예산을 책정하지 않았으나 민주당은 올해 예산으로 3525억 원을 편성한 데 이어 내년도에 대해서도 대규모 증액에 나섰다.
국토위에서는 이 대표가 주장한 ‘청년 패스(청년 3만 원 교통비 지원)’ 예산도 새롭게 책정됐다. 당초 예산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청년 월 3만 원, 일반국민 월 5만 원 등 대중교통비 지원 예산이 2923억 원 편성됐다. 각 상임위에서는 올해 잼버리 사태로 비판을 받은 새만금 관련 예산도 대폭 늘렸다. 국토위에서는 새만금~전주 고속도로 예산 857억 원, 새만금 신공항 건설 514억 원 등을 증액했으며 국회 농림축산해양수산위원회에서도 새만금신항 1239억 원, 새만금수목원 건설 156억 원 등 예산을 늘렸다.
이날 산자위에서는 민주당 주도로 1000억 원 규모의 원전 생태계 금융지원, 333억 원 규모 혁신형 소형모듈 원자로(i-SMR) R&D(연구개발) 예산, 250억 원 상당 원전 수출 보증 예산, 112억 원 규모의 원자력 생태계 지원사업 예산 등이 삭감됐다. 반면 신재생에너지 보급 지원(1620억 원), 신재생에너지 금융 지원(2302억 원), 신재생에너지 핵심기술개발(579억 원) 등 신재생에너지 관련 예산은 증액 의결됐다. 문재인 정부 시기 설립된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의 사업지원 예산도 127억 원 증액됐다.
함께 민주당이 단독으로 의결한 내년도 중소벤처기업부 예산안에서도 중소기업 기술혁신개발, 중소기업 상용화 기술개발, 창업성장기술개발 분야에서 원전 R&D 과제 129개의 예산 208억 원이 감액됐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은 “국가가 간병비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며 간병비 예산 복원 카드까지 꺼내들어 추가적인 예산 증액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달 간병비가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 최대 상승 폭인 9.3%를 기록했다”며 “급속한 고령화 때문에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긴축재정 방침에 보조를 맞춰야 할 여당 역시 내년 총선에서 표심을 노린 ‘선거용 돈풀기’ 전략을 고심하는 분위기다. 앞서 여당은 연구개발(R&D)과 민생 분야 등 40개 주요 사업을 선정해 증액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대학생 대상 아침 식사 비용을 지원하는 ‘천 원의 아침밥’, 고령자 무릎관절수술·임플란트 지원 확대, 소상공인 전기요금 특별 감면 신설 등 선심성 복지 사업이 포함됐다. 이에 대해 재정 여력이 고갈되고 있는 상황에 맞지 않고 정확한 효과 분석 없이 주먹구식 증액을 추진하는 정책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이러한 여야의 예산안 처리 방침을 두고 “총지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국회에서 마무리되는 일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심사에 임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여야가 예산 증액 경쟁에 전념하는 사이 최대 피해는 청년층이 지게 됐다. 민주당이 최근 고용노동부가 제출한 2382억 원 규모의 ‘청년 일 경험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정부 여당이 ‘청년내일채움공제’ 예산의 증액을 받아들이지 않자 보복성으로 정부 청년 예산을 삭감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여당은 “민주당이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이 내년도 나라 살림을 막무가내로 난도질하고 있다”며 “사사건건 틈만 나면 국회에서 완력 행사를 반복해온 민주당이 내년도 예산안 역시 마음대로 자르고 더하고 해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고질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재정 건전 기조를 확고히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 보다 두텁게 지원하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이 담긴 예산안에 민주당은 묻지마 난도질을 일삼고 뻔뻔하게 이재명 대표 광내기 예산으로 채우려 하는 것”이라며 “내년도 나라 살림을 민주당의 총선 홍보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꼬집었다.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의 충돌 속에 피해를 입게 된 청년들의 허탈감도 깊어지고 있다. 올해 고용노동부의 5개월 짜리 ‘청년도전지원사업’에 참여했던 임지영(31) 씨는 “정말 이 사업이 (취업) 실적이 저조해서 사라지는 것인가, (여느 일자리 사업처럼) ‘취업 안 됐네’ ‘의미 없네’라는 식으로만 판단한 것인가”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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