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6일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대한 재의 요구권(거부권)을 재가했다. 대통령실이 임기 후반부 ‘양극화 타개’를 화두로 민생에 집중하며 정치 현안과 최대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지만, 김 여사 특검법은 △삼권 분립에 어긋나고△제3자 추천 무늬만 갖춘 야당 임명 특검△선수가 심판을 선택해 사법 시스템의 본질에 반하는 법안이라며 즉각 거부권을 행사했다. 더불어민주당은 4·19 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거론하며 비판의 강도를 한층 더 높였다. 야당 단독 표결→대통령 거부권→국회 재표결이라는 ‘정쟁 쳇바퀴’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알림을 통해 “윤 대통령이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 주가조작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재의요구안’을 재가했다”고 밝혔다. 김 여사 특검법으로는 3번째, 법안 기준으로는 취임 후 25번째 거부권이다. 윤 대통령은 거부권을 법안이 이송된 다음 날부터 15일 이내인 29일까지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이날 즉각 처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특검법이 기존 두 차례 거부권이 행사된 특검법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지난 14일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단독 처리한 ‘김 여사 특검법’은 수사 대상을 기존 13개에서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개입 의혹과 명태균 씨 관련 부정선거 의혹 등으로 좁히고 특검 후보를 제 3자인 대법원장이 추천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하지만 특검 추천 구조, 수사 대상, 수사팀 규모 등이 삼권분립 및 인권 보호 원칙에 여전히 어긋나고 기존보다 위헌성은 더 강화돼 거부권을 행사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날 한덕수 총리는 국무회의에서 작정하고 김 여사 특검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한 총리는 “특검 후보자 추천권을 대법원장이 행사하는 방식으로 수정됐지만, 야당이 무제한으로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어 제3자 추천의 형식적 외관만 갖췄을 뿐 실질적으로는 야당이 특검 후보자 추천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 총리는 “폐기된 특검법안보다 수사 대상을 일부 축소했다고는 하지만, 검찰과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특검을 도입함으로써 특검 제도의 보충성·예외성 원칙을 훼손한다는 본질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또 “재의요구권은 대통령제를 취하고 있는 우리 헌법에서 대통령이 입법부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며 “헌법수호 의무가 있는 대통령은 위헌적 요소가 있는 법률안에 대해 재의요구권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날 법무부 역시 5페이지의 ‘반복 의결된 위헌적 특검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 의결’ 자료를 통해 “‘주요 수사대상’을 고발한 야당이 특검 후보 추천권까지 행사해 사실상 고발인이 수사기관과 수사대상을 선택할 수 있어 사법 시스템을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선수가 심판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수사는 증거를 좇는 과정인데 이번 특검법안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증거가 아닌 사람을 쫓는 수사’를 위한 도구가 될 염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실은 또 윤 대통령이 김 여사 문제와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사과를 한 점, 대외 활동 자제 조치에 나섰다는 점에서 특검까지는 필요 없다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해당 법안은 다시 국회로 되돌아가 재표결을 거치게 됐다. 재표결은 재적의원(300명) 과반이 출석해 출석 의원의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가결된다. 108석을 가진 국민의힘에서 8표 이상 이탈표가 나오지 않는 한 법안은 폐기된다. 여당이 현재 당원 게시판 내홍을 겪고 있지만, 김 여사 특검법과 관련해 이탈표가 쏟아질 분위기는 아니라는게 중론이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위증교사 혐의 1심 무죄 선고 이후 곧장 특검법을 고리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모습이다. 야권 일부 강성 의원들은 ‘탄핵’을 언급하고 나선 가운데, 민주당 내에선 여당의 이탈표를 더 많이 이끌어내기 위해 본회의 재표결 날짜를 미루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본인과 가족을 대상으로 한 특검이나 검찰 수사를 거부한 사람은 윤 대통령이 유일하다”고 비판했다. 또 “박근혜 국정농단 특검의 수사팀장이었던 윤 대통령이 특검을 위헌이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느냐”고 몰아세웠다.
민주당은 28일 본회의에서 김 여사 특검법 재표결을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여권 내분 상황을 지켜보면서 처리 시점을 선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표결 부결에 대비해 여당 추천권을 배제한 상설 특검 규칙 개정안도 28일 본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다. 비록 검사 숫자가 적고 활동 기간도 짧지만, 대통령 거부권 행사 대상이 아니라 곧장 특검을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해병대원 순직사건 국정조사 실시계획서도 같은 날 통과시킴으로써 특검과 국정조사를 동시에 압박하는 양동 작전을 펼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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